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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지 리뷰

'서울의 봄' 잇단 의문사와 사고들..참군인들의 비극적인 안타까운 삶(1212군사 반란 이후의 삶)

by luciaworld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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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개봉일 : 2023.11.22

등   급 : 12세 관람가

장   르 : 드라마

국   가 : 대한민국

러닝타임 : 141분

배    급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줄거리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 군사 반란 발생 그날,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26일 이후, 서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도 잠시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광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 내 사조직을 총동원하여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 권력에 눈이 먼 전두광의 반란군과 이에 맞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을 비롯한 진압군 사이, 일촉즉발의 9시간이 흘러가는데… 목숨을 건 두 세력의 팽팽한 대립 오늘 밤, 대한민국 수도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펼쳐진다!

 

후기

개봉한 주에 봤던 영화를 이제서야 짧은 후기를 써본다. ㅠ_ㅠ글을 쓰는 현 기준 누적 관객 수는 1,111만명!!  1000만은 넘길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넘겼네요. 이제는 열기가 식고 있지만 초반 관객 동원력이 대단했던 영화예요. 전두환 전 대통령 때의 대략적인 역사는 알고 있는 저였지만, 영화를 보면서 조금 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141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순식간에 갔습니다. 참 보는 내내 기분이 안 좋아져서 재미있다는 표현은 조금 그렇지만, 장면들이 빠르게 바뀌면서 몰입감을 줬던 것 같고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역사였기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반란군과 끝까지 싸웠던 참 군인들이 있었단 사실에 조금은 안도가 되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못 지켜냈던 참군인들이 안타까우면서도 목숨을 건진 분들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날 이후가 걱정돼서 그분들의 행적을 조금 찾아봤습니다. 역시나 순탄치 않았던 삶들에 괜히 찾아봤나 싶기도 하고 우리가 기억해 주는 게 그분들에게도 더 좋을 것도 같은 복잡한 심정이네요. 

 

쿠키영상

참고로 쿠키영상은 없습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의 삶

 

장태완 수경사령관

  - 정우성 (이태신 역)

 

 

극 중 이태신의 실존 인물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육군 소장)은 1212 군사 반란 이후 보안사령부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뒤 가혹한 조사를 받게 된다. 1980년 2월 풀려난 뒤 강제 전역하게 된 장태완 소장은 감시를 받으며 6개월 간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고초를 본 후 충격으로 곡기를 끊게 되고 1980년 4월 세상을 떠납니다.

 

여기서 비극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극 중에서도 공부 잘하는 아들로 나왔던 장 소장의 아들 성호(당시 20세)씨는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했었는데, 1982년 1월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뒤 행방불명됐고, 한 달 뒤 2월9일 장 소장의 고향이었던 경북 칠곡 낙동강 기슭 조부 묘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장 소장은 현장에서 꽁꽁 언 아들을 끌어안고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좀 더 따듯하게 아들을 감싸 안아줘야 했다"라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1993년 펴낸 장 소장의 회고록인 '1212 쿠데타와 나'에서 "미칠 정도로 아들놈 생각이 나면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은 채 묘지로 달려가 대성통곡을 하고 그러다 지쳐버리면 그놈 옆에 누워 밤을 같이 새워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문 소리만 나면,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아들놈 생전 모습이 선하게 들어왔다. 그럴 때면 아들놈의 공부방으로 건너가 내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아들놈 머티털 한 줌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볼에 비벼대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곤 했다"라고 그 당시의 절절한 아버지의 심정을 밝혔습니다.

 

시간이 흘러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시대가 가고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장 소장은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데, 2002년 3월 "1212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해 멸문지화를 입었던 사람으로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을 돕고 600만 재향군인들의 권익을 향상하겠다"라며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이후 2010년 7월 숙환으로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가 떠난 2년 뒤인 2012년 1월 그의 아내가 아파트 단지에서 숨진 채 발견돼 또 한 번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정승화 참모총장

  - 이성민 (정상호 역)

 

정상호 역으로 나왔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212군사 반란 이후 보직에서 해임되고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 당한 그는 육군 최고 지위였던 4스타에서 이등병으로 무려 17계급 강등이라는 수모를 받아야만 했다. 급여 몰수 및 군인연금 권리까지 빼앗겨 경제적인 위기를 처했던 그는 YS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무죄 판결을 받게 되고 복권되어 대장 자격 및 연금 권리까지 되찾게 되며, 사후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 정만식 (공수혁 역)

 

영화 속 반한에 가담한 공수여단에 배신감을 느껴 유일하게 남은 9공수여단에 반란군 진압 명령을 내렸던 공수혁 특전사령관의 실존 인물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육군 소장)이다. 정 소장은 영화에서처럼 반란군이 특전사령부로 와 그를 체포하는 그 순간까지 저항했다. 영화 속에서처럼 그에겐 체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던 부하가 있었는데, 비서실장 김오랑(극 중 오진호) 소령으로, 그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정 소장 역시 전역을 하게 됐는데, 그는 김 소령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커 방황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정 소장은 1985년 한 인터뷰에서 " 내 몸이 성할 때까지는 김 소령의 무덤을 돌보고, 내가 죽고 나서는 자식들이 계속 참배할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었다. 그는 서울 근교 인적 드문 야산이나 교외를 홀로 산책하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곤 했다.

 

12.12 군사 반란 당시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었던 정 소장은 1988년 10월 행방불명 됐고,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 경기 의정부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돼서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생전에 정 소장은 군사정권으로부터 취업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뒤 곤궁하게 살았는데, 그는 주로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며, 시신 발견 당시에도 주머니에선 버스 토큰 5개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쓸쓸한 그의 죽음에 당시 장태완 소장은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그는 장태완 소장에게 "12.12 진상 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조심하자"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묘비에는 비명을 새기지 않았는데 유족들이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고 사인을 밝힌 뒤에야 비명을 새기겠다고 했다 전하집니다.

 

 

김오랑 소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

  - 정해인 (오진호 역)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은 영화 속에서처럼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의 6발의 흉탄을 맞아 숨졌는데, 반란군은 그의 시신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했고, 그의 가족들에게 사망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특전사로 오래 복무했던 김 소령은 후방 지역 편한 보직을 마다하고 병 때문에 시력을 잃어가던 아내의 치료를 위해 서울에 남았었는데, 12.12군사반란 9개월 전인 1979년 3월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됐다고 합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 씨는 쿠데타 당시 불안한 마음에 여러 차례 사령부로 전화를 했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씨는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이 내 전화를 받았을 때 사령관실 내 흩뿌려진 김 소령의 피를 청소하고 있었다고 한다"라며 "자신들 상관의 피를 닦으며, 그 부인에게서 결려온 전화를 차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통곡했다.

 

영화에서처럼 김오랑 소령 부부와 같은 군인 아파트에 살며 선후배 사이로 지내던 박종규 중령의 배신도 컸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에 앞장섰던 박종규 중령은 김 소령을 구하지 않았는데, 후에 백씨를 만나 박 중령은 "김 소령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반항해 그 같은 변을 당한 것"이라고 되레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김 소령의 암매장 3개월 후 동료들의 항으로 1980년 2월28일 서울국립현충원 제29묘역에 이장됐으며 논란 끝에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홀로 남은 백씨는 당시 머물던 장교 관사에서 쫓겨났으며, 남편의 죽음으로 남아있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백씨는 고향 부산에서 전화 상담 봉사를 하며 김 소령 구명 운동을 펼쳤다. 1990년 12월 신군부 세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려다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갑작스레 소송을 포기했으며, 이후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를 호소했다. 

 

백씨는 1991년 6월 봉사활동하던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며, 당시 경찰은 백씨의 허리 높이의 난간에서 실족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의문사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밝혀진 바는 없다. 백씨의 시신은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됐다. 김오랑 소령의 조카 김영진 씨는 YTN라디오에 출연해 "다른 질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며칠 후 독일에 가서 눈 수술을 하기로 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상적인 죽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김진기 현병감

  - 김성균 (김준엽 역)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납치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대한 체포를 강력히 요청하고, 노재현 국방잔관과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등이 모두 육군본부를 버리고 달아날 때도 끝까지 남았었던 김진기(영화 속 김준엽 현병감) 육군 현병감은 군사 반란 이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며, 이듬해 강제 전역당했다. 그 후 반란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보기 싫다며 낙향했으며,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6년 1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무고한 병사들의 희생

당시 반란군과의 교전에서 숨진 병사들도 있었다. 영화에서도 짧게 나왔던 지사 벙커에서 반란군 공격에 스러져간 병사는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었던 정선엽 병장으로 당시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박윤관 일병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과정에서 발생한 교전에서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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